모두가 부러워하는 청년, 파멸의 시작
1818년 프랑스 파리의 한 허름한 방. 스물일곱 살 청년의 눈은 광기로 번뜩였고, 며칠 전 밀어버린 머리카락은 까슬까슬했습니다. 방구석에는 썩어가는 시체의 팔다리와 잘린 머리가 뒹굴었습니다. 정신이 나갈 정도의 끔찍한 악취였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시체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청년이었습니다. 평생 먹고살 걱정 없는 부자, 재능을 인정받는 화가, 파리 사교계의 멋쟁이.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건 지나가 버린 얘기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여섯 살 연상의 외숙모와 금지된 사랑에 빠졌고, 끝내 아들까지 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옥을 캔버스에 담다: '메두사호의 뗏목'
그는 미친 듯이 캔버스에 매달렸습니다. 당시 프랑스 사회를 뒤흔든 대참사, ‘메두사호 뗏목 사건’을 그리며 자신의 마음속 지옥을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격정을 담은 걸작, ‘메두사호의 뗏목’이 태어났습니다. 그 남자는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 테오도르 제리코(1791~1824). 한때 모든 것을 가졌던 그는 어떻게 이토록 처절한 광기에 사로잡히게 된 걸까요. 이것은 한 남자의 영혼이 파괴되는 과정, 그 파멸 속에서 피어난 불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유로운 영혼, 금수저 화가의 탄생
제리코는 ‘금수저’였습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열일곱 살 때 어머니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고,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그 자유로 제리코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학교를 때려치우고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천부적인 미술 재능이 있었거든요. 제리코는 규칙과 규율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카데미에 입학해 교육 과정을 따르는 대신 여러 화가의 작업실을 오가며 자유롭게 그림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신고전주의 vs 낭만주의: 예술적 갈등
당대 미술계의 절대적인 대세는 ‘신고전주의’. 안정적인 구도와 깔끔한 선으로 교훈을 주는 역사나 신화 이야기를 그리는, MBTI로 치면 ‘T’(사고형)에 가까운 화풍이었습니다. 신고전주의를 이끄는 대장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거장인 자크 루이 다비드였습니다. 다비드의 그림은 유일한 ‘정답’이었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다비드의 화풍을 충실히 따랐는가’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제리코는 그 규칙을 따를 생각이 없었습니다. 신고전주의 화풍은 인간 자체가 ‘F’(감정형)이었던 제리코와 상극이었기 때문입니다.
미친 사랑, 비극의 씨앗
제리코에게는 자신을 후원하고 격려해주던 자상한 외삼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27살 연하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알렉상드린이 있었지요. 제리코에게는 외숙모가 되는 인물입니다. 제리코와 불과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그녀는 나이 많은 남편에게 기대할 수 없는 교감과 열정을 젊은 조카에게서 찾았습니다. 제리코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끌렸습니다. 하지만 외숙모, 그것도 아버지처럼 자신을 돌봐주던 외삼촌의 아내와 불륜을 벌이는 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사회적 금기. 어떤 선택이 옳은지는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건 미친 짓이야. 그만둬.” 제리코의 머리는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이성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녀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어.” 결국 제리코는 알렉상드린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파국, 그리고 지옥: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매혹적인 사랑에 굴복했다고 해서 죄책감과 두려움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제리코가 겪는 고통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탈리아 로마로 향했습니다. 명목은 그림 공부를 위한 유학이었지만, 사실상 외삼촌과 외숙모의 곁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한 선택이었지요. ‘로마에서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을 보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야. 미술 공부에 전념하면 잡념도 사라질 테고.’ 하지만 로마에서조차 제리코의 눈을 사로잡은 건 고요한 고전 미술이 아닌, 미켈란젤로가 그린 뒤틀린 육체가 뿜어내는 고통과 에너지였습니다.
메두사호 사건: 절망 속 희망을 그리다
사랑, 갓 태어난 아들, 가족과의 관계를 모두 잃고 고립된 스물일곱 살의 제리코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나날을 보내던 제리코. 어느 날 그는 신문에서 ‘메두사호 난파 사건’의 기사를 접했습니다. 제리코는 이 사건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사회적 금기를 어기고 추방당한 채 죄의식에 미쳐 가는 자신을, 살아남기 위해 모든 걸 버려야 했던 생존자들에 비춰 본 겁니다. 금기를 어긴 사람도 살아 있을 자격이 있는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가. 작품을 완성한다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제리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메두사호 사건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광기와 예술: '메두사호의 뗏목' 탄생
제리코는 일단 머리부터 박박 깎았습니다. 자신을 작업실에 가두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작품을 그리기 위한 사전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생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뗏목의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의 상태를 알기 위해 외과 의사들을 인터뷰하고 병원을 들락거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제리코는 영안실에서 절단된 팔다리와 머리를 빌려오기까지 했습니다. 시체가 썩어들어가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리코는 그림의 아래쪽에 이미 죽은 사람과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넋이 나간 노인이 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한편으로 그림의 위쪽, 뗏목 가장 높은 곳에는 필사적으로 옷가지를 흔들며 구조선에 신호를 보내는 생존자들을 그렸습니다. 그 가장 위에 있는 남자는 삶에 대한 마지막 의지와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제리코는 새벽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절망의 늪 속에서 그림으로 구원받고 싶다는 한 줄기 희망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걸작의 탄생과 논쟁, 그리고 좌절
1819년 살롱 전시에 ‘메두사호의 뗏목’이 공개되자 미술계는 격렬한 논쟁에 휩싸였습니다. 그림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들어 제리코를 헐뜯었습니다. ‘색이 너무 어둡다.’ ‘드넓은 바다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림만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왕 루이 18세는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리코, 당신은 위대한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이듬해 제리코는 작품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상업 전시를 열었습니다. 전시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많은 4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런 성공도 제리코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우울증은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광인 연작: 내면의 고통을 그리다
1821년, 제리코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오랫동안 겪고 있던 폐결핵에 우울증이 겹쳐 몸과 마음은 모두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중 제리코가 당한 승마 사고는 그의 건강에 치명타를 날렸습니다. 앓고 있던 결핵이 악화됐고, 결핵균이 척추에 침범하면서 척추 종양이 생겨난 겁니다. 하지만 제리코는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선은 이제 바깥세상의 드라마가 아닌 인간의 내면으로 향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조르제 박사의 의뢰를 받아 그린 ‘광인 연작’은 그의 마지막 걸작으로 꼽힙니다.
예술가의 삶, 지옥에서 건져 올린 걸작
제리코는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격렬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낭만주의자’ 그 자체였습니다. 낭만주의적 기질로 인해 제리코는 인간의 도리를 어기는 잘못을 저질렀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감정을 경험했으며, 그것을 캔버스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마치 태양을 좇는 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들듯이. 그래서 예술은 제리코를 구원했을까요. 그는 여러 걸작을 남겼지만, 정작 자신은 지옥에서 단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전부를 던져 두 척의 배를 육지로 밀어 올렸습니다. 한 척은 ‘새로운 예술’이라는 배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척은 ‘아들의 삶’이라는 작은 조각배였습니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질문들
Q.제리코는 왜 낭만주의 화가가 되었나요?
A.제리코는 규칙과 규율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차가운 머리 대신 뜨거운 가슴으로 세상을 보고, 그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기질은 그의 예술관과 삶 전체를 이끌었습니다.
Q.메두사호의 뗏목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A.메두사호의 뗏목은 제리코가 사회적 금기를 어기고 죄의식에 시달리며 느낀 절망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생존자들의 모습은 제리코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것이며,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Q.제리코의 삶이 불행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제리코는 낭만주의적 기질로 인해 인간의 도리를 어기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건강 문제와 우울증으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았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성공과는 별개로, 개인적인 삶은 불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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